네 명의 황제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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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 명의 황제의 해는 68년부터 69년까지 로마 제국에서 네 명의 황제가 연이어 즉위한 혼란기이다. 네로 황제가 자살하고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가 차례로 황위에 올랐으며, 마지막으로 베스파시아누스가 권력을 잡으면서 플라비우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군사적 반란과 내전이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유대 전쟁과 갈리아에서의 반란 등 제국 전반에 걸쳐 혼란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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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황제의 해 | |
---|---|
개요 | |
![]() | |
분쟁 | |
날짜 | 69년 |
장소 | 로마 제국 |
원인 | 네로의 죽음으로 인한 후계자 위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종식 |
결과 | 플라비우스 왕조의 수립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제 즉위 |
교전 세력 | |
갈바 지지 세력 | 히스파니아 갈리아 |
오토 지지 세력 | 로마 달마티아 |
비텔리우스 지지 세력 | 게르마니아 |
베스파시아누스 지지 세력 | 시리아 유대 속주 이집트 다뉴브 군단 |
주요 인물 | |
황제 | 갈바 (사망) 오토 (사망) 비텔리우스 (사망) 베스파시아누스 (즉위) |
기타 |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오토의 형제)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게르마니쿠스 페트로니아누스 (비텔리우스의 아버지)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무시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 코르넬리우스 푸스쿠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키빌리스 |
전투 | |
주요 전투 | 포룸 율리 전투 로쿠스 카스토룸 전투 베드리아쿰 전투 (1차 및 2차) 바타비 반란 |
2. 배경
54년 네로가 황제로 취임하여 초기에는 세네카와 부루스의 보좌를 받아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55년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하고, 59년에는 친어머니 소 아그리피나를, 62년에는 아내 옥타비아를, 65년에는 세네카에게 자살 명령을 내렸다. 64년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여 민심이 혼란스러워지자, 기독교에 책임을 뒤집어 씌워 박해하였다. 이로 인해 사도 성 바오로 등의 성직자들이 순교하는 등 교회는 타격을 입었고, 네로는 폭군으로 불리게 되었다.[3]
4차 파르티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코르블로와 게르마니아 총독 두 명을 반역 혐의로 자살하게 만들어 로마 군 내부에서 네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다.[4]
2. 1. 네로의 몰락
68년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 갈바가 주도한 반란이 일어났고, 이에 각지의 총독들이 동조했다. 마침내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으로 선고받은 네로는 68년 6월 8일 자살했다.[3]67년에서 68년 겨울에 걸쳐 갈리아 루그두넨시스의 총독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는 네로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다른 총독들과 관리들의 지지를 구했다. 빈덱스는 스스로 제국을 탐내지 않았고 후보자를 지명하지도 않았는데, 이는 자신의 지지자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빈덱스는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의 총독인 갈바에게 지원을 요청했다.[4]
68년 3월 중순, 빈덱스는 계획을 진행하여 갈리아 부족민들로 구성된 군대를 모았지만, 라인강에 주둔한 7개 군단의 장교들을 포섭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결국 빈덱스는 갈바에게 눈을 돌렸다.[5]
68년 4월 초, 갈바는 빈덱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카르타고 노바(현재 카르타헤나)에서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는 빠르게 히스파니아 바에티카와 루시타니아의 관리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6]
한편, 빈덱스는 자신의 수도 루그두눔을 포위해야 했다. 이로 인해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의 총독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가 빈덱스를 향해 진군했다. 그는 빈덱스를 지지하는 세쿠아니 부족의 수도 베송티오(베장송)를 포위했고, 빈덱스는 루그두눔 포위 공격을 중단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출발해야 했다. 베송티오 앞에서 베르기니우스와 빈덱스는 회담을 가졌고, 그들은 네로에 대항하여 세력을 합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베르기니우스의 군단은 그 합의를 무시하고 준비되지 않은 빈덱스의 군대를 공격했고, 2만 명에 달하는 빈덱스의 병사들이 사망했으며, 빈덱스는 자살했다. 곧 라인강 군단은 베르기니우스를 황제로 선포했지만, 그는 거절했다.[7]
로마에서 네로는 갈바의 주장에 저항할 조직을 갖추지 못했고, 심지어 이집트로 도피하는 것까지 고려했다. 결정적인 행동은 근위대 부대장인 님피디우스 사비누스가 자신의 부하들을 설득하여 네로를 버리게 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그는 갈바가 각자에게 30000Sestertius(10년치 봉급에 해당)를 줄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새 황제에게 보상받을 것을 기대했다.[9] 68년 6월 9일, 원로원은 네로를 국가의 적이라고 선포하고 갈바를 황제로 선포했고, 이는 네로의 자살로 이어졌다.[10]
네로는 어머니 아그리피나, 아내 옥타비아, 스승 세네카를 비롯해 많은 원로원 의원들을 차례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또한 파르티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코르블로와 게르마니아 총독 두 명을 반역 혐의로 자살하게 만들어 로마 군 내부에서 네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다.
67년,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총독 빈덱스가 갈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켜 갈바를 황제로 추대했다.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의 군단을 이끄는 루푸스는 빈덱스 토벌을 위해 즉시 군대를 이동시켜 반란을 진압했고, 빈덱스는 자살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반란에 호응하는 형태로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총독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도 네로에게 반기를 들었고, 이웃 루시타니아 총독 오토도 이에 가담했다. 처음에 원로원은 갈바를 "국가의 적"으로 탄핵했다. 하지만 갈바가 로마로 진군하기 시작하자, 원래 네로와 거리를 두었던 원로원은 이번에는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고, 반대로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했다. 또한 님피디우스 사비누스에 의해 프라이토리아니가 매수되어 네로는 직속 병력인 프라이토리아니에게까지 배신당했다. 네로는 갈바가 로마에 입성하기 전에 자살했다.
3. 네 황제의 옹립
68년 네로 황제가 자살한 후, 로마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 속에서 네 명의 황제가 연이어 옹립되었는데, 이들을 '네 황제'라고 부른다.
- 갈바: 히스파니아 타라고넨시스 총독이었던 갈바는 네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빈덱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원로원은 네로 사후 갈바를 황제로 선포했다.[4],[10]
- 오토: 루시타니아 총독 출신인 오토는 갈바를 지지하여 권력을 잡는 데 기여했다. 군인들의 지지를 받던 그는 갈바와 그의 후계자를 제거하고 황제가 되었다.[22]
- 비텔리우스: 69년 1월 2일 게르마니아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비텔리우스는[18] 부하들을 시켜 오토를 공격하고 로마를 점령했다. 이후 4월 16일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황제가 되었다.[1]
- 베스파시아누스: 유대독립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 유대, 시리아 주둔 군단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다. 그는 비텔리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에 입성하여 내전을 종식시키고 플라비우스 황조를 열었다.[7]
3. 1. 갈바 (68년 - 69년)
히스파니아 타라고넨시스 총독이던 갈바는 68년 네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갈리아 총독 빈덱스에 의해 반란의 주모자로 추대되었다.[4] 빈덱스는 군대에 의해 진압당했지만[7] 68년 6월 8일 네로가 자살한 직후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10]
갈바는 즉위 당시 이미 65세였다. 10월에 로마로 돌아와 국정에 관하여 내린 조치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중 하나가 네로의 선물을 몰수한 것으로, 재정을 다시 건전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19] 수하들까지 탐욕적으로 재물을 긁어모아 갈바에 대한 사람들의 신임은 더욱 떨어졌다. 또한 갈바는 음모를 극도로 두려워하여 다수의 원로원 의원과 에퀴테스(기사 계급)을 재판 없이 처형했다.
69년 1월 2일에는 라인 강 방위군이 갈바가 황제가 된 데에 불만을 품고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18] 1월 10일에는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리키니아누스를 입양하여 자신의 후계자임을 세상에 알렸는데 이는 자신이 갈바의 후계자라고 생각하고 있던 오토를 분노케 하여 오토의 쿠데타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21] 오토는 1월 15일에 황제를 수행하던 중 일행에서 빠져나와 근위대에 접근하여 황제로 추대되었다. 갈바는 이에 당황하여 반란군과 대항하려 했으나 오토 측의 기병에 공격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나이 72세였다.[21]
3. 2. 오토 (69년)

오토는 루시타니아 총독 출신으로, 네로 정권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갈바를 지지하여 권력을 잡는 데 기여했다. 군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그는 갈바와 그의 후계자 피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 원로원의 투표를 통해 황제가 되었다.[22]
오토는 황제가 된 지 3개월 만에 비텔리우스가 일으킨 내란에 직면했다. 비텔리우스는 게르마니아 전쟁 베테랑으로 구성된 I ''Germanica'' 군단과 XXI ''Rapax'' 군단 등 정예 군단의 지지를 받았다. 오토는 내전을 원치 않아 평화를 제안했지만, 이미 비텔리우스의 군대는 이탈리아로 진군하고 있었다.
오토는 초기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베드리아쿰 제1차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는 도망치는 대신 자살을 선택하여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켰다. 그의 통치 기간은 3개월 남짓이었다.
오토는 36세의 젊은 나이였고, 루시타니아 총독 시절에는 선정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병사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또한 네로의 측근이었던 가이우스 오포니우스 티겔리누스를 자살하게 하여 로마 시민들의 환심을 샀다. 그러나 비텔리우스의 군대는 멈추지 않았고, 오토는 도나우 군단을 불러들여 저지하려 했다. 양군은 크레모나 근교에서 격돌했고(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 오토의 군대는 패배했다. 하지만 오토는 패전 소식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선택했다.
시민 간의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자결한 오토는, 그 이전까지의 성격과 태도와 비교되어 많은 시민들의 감탄을 얻었다.
3. 3. 비텔리우스 (69년)
비텔리우스는 69년 1월 2일 게르마니아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실제 군대를 이끌고 오토를 공격하여 로마를 점령한 것은 그의 부하들인 카이키나와 발렌스였다. 비텔리우스는 4월 16일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승인되었다.[1]로마로 가는 길에 비텔리우스는 사치스러운 축제와 무분별한 행동을 보였다. 특히 "죽은 적의 냄새는 달콤하다"는 그의 말은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5월에는 자신의 게르마니아 군을 근위대로 승격시키고 기존의 수도 근위대를 해체했다. 7월 1일, 베스파시아누스가 비텔리우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1] 7월 18일 비텔리우스는 군대와 함께 로마에 입성했지만, 부하들의 전횡을 방치하고 향락에 빠져 정치를 등한시했다.[1]
비텔리우스는 연일 향연을 벌여 국고를 탕진하고, 빚을 갚으라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등 잔혹한 행동을 했다. 재정이 악화되자 자신을 상속인으로 지목한 시민들을 살해하고, 잠재적인 경쟁자들을 암살했다.[2] 하루 식비가 100000데나리우스에 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3]
비텔리우스의 통치는 원로원의 무력함 속에 이루어졌지만, 그는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지 못했다. 로마 입성 후, 게르마니아 군인들의 행실은 로마의 치안을 악화시켰다. 또한, 오토 측에 섰던 도나우 군단의 켄투리오(백부장)들을 처형하면서 비텔리우스의 인기는 급락했다. 로마 시민들은 새로운 황제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3]
10월에는 도나우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며 로마로 진격했다. 12월 20일, 비텔리우스는 군사를 보냈으나 패배하고 퇴위를 간청했지만, 시민들에게 거부당하고 처형되었다.[1]

3. 4. 베스파시아누스 (69년 - 79년)
유대독립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를 평정할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유대 땅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지략과 용맹성으로 갈릴래아 지역을 점령하고 요셉이라는 유다인 지도자를 포로로 잡았다. 네로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큰 혼란이 일어나자, 로마인들은 베스파시아누스를 이 혼란을 수습할 적임자로 선택했고, 그는 비텔리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에 입성했다.[7]
이집트와 유대 및 시리아 속주에 주둔한 군단들은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서기 67년 네로로부터 유대에서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을 진압하라는 특별 명령을 받았다. 그는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의 지지를 얻었다. 유대와 시리아 군단에서 뽑힌 강력한 군대가 무키아누스의 지휘하에 로마로 진군했다. 베스파시아누스 자신은 알렉산드리아로 이동하여 7월 1일 황제로 추대됨으로써 이집트로부터의 중요한 곡물 공급을 장악했다. 그의 아들 티투스는 유대 반란을 처리하기 위해 유대에 남았다. 동방 군단이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레티아와 모이시아 속주에 있는 다뉴브 군단도 8월에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지휘하에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10월, 프리무스가 이끄는 군대는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비텔리우스의 군대를 압도적으로 격파했다.[7]
베스파시아누스는 내전 상태의 로마를 평정하고 국가의 질서를 회복시키면서 무능한 군인 출신 세 황제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최초의 평민 출신 로마 황제이며, 그의 아들 티투스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는 플라비우스 황조를 열었다.[7]
상원은 69년 12월 21일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인정했다. 비텔리우스 사후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황권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을 받지 않았다. 그는 안정적인 플라비우스 왕조의 창시자가 되었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계승했다. 그는 79년 자연사했다. 플라비우스 황제들은 서기 69년부터 서기 96년까지 차례로 통치했다.[7]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군 사령관이었고,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유대 지방을 평정하여 군사 능력을 보여주었고, 로마 전체 식량의 절반을 담당했던 이집트를 지배하여 로마 전체의 식량을 장악했다.
동방을 안정시킨 베스파시아누스는 무키아누스에게 군대를 맡겨 발칸 반도를 거쳐 로마를 공략하게 했다. 그러나 무키아누스는 다키아에서 이민족의 침입에 대처하느라 진군을 일시 멈췄고, 그 사이 비텔리우스에게 원한을 품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군단 병사들이 크레모나에서 비텔리우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 기세를 탄 프리무스의 군단은 로마를 점령하고 비텔리우스를 살해했다. 몇 달 후, 이민족의 침입을 막은 무키아누스는 로마에 무혈 입성하여 화재로 파괴된 유피터 신전(이 사건에 휘말려 베스파시아누스의 형 사비누스가 사망했다)을 재건하고 평화 회복을 선언했으며,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서 로마에 입성했다.
서기 70년, 베스파시아누스의 장남 티투스가 지휘하는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유대군 잔당은 마사다로 도망쳤지만 소수였고, 예루살렘 함락으로 유대 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또한 게르마니아에서 발발한 반란에 대해서도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아리스가 지휘하는 로마 군대가 반란군을 격파했고, 케리아리스는 항복했다. 이로써 내전은 일단락되었다.
4. 결과 및 영향
네 명의 황제의 해는 로마 제국에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을 야기했지만, 베스파시아누스의 즉위로 안정되었다. 이 사건은 군부의 정치 개입과 황제 계승의 불확실성이 제국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었다.
5. 연표
5. 1. 68년
네로 (재위 54년~68년)의 통치 말기는 65년의 피소 음모 사건과 같은 정치적 재판과 음모로 얼룩졌으며, 이는 상원 귀족들의 황제에 대한 환멸을 보여준다.[3] 67년에서 68년 겨울에 걸쳐 갈리아 루그두넨시스(Gallia Lugdunensis)의 총독인 빈덱스는 네로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다른 총독들과 관리들의 지지를 구했다. 비교적 낮은 출신임을 알고 있던 빈덱스는 스스로 제국을 탐내지 않았고, 후보자를 지명하지도 않았는데, 이는 자신의 지지자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빈덱스에게 연락이 온 사람들은 그의 편지를 네로에게 전달했지만, 한 사람을 제외하면 그의 남쪽 이웃이자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Hispania Tarraconensis) 주지사였던 가장 큰 스페인 속주 총독인 갈바였다.[4] 68년 3월 중순, 빈덱스는 계획을 진행하여 갈리아 부족민들로 구성된 군대를 모았지만, 라인강에 주둔한 7개 군단의 장교들을 포섭하려는 그의 시도는 갈리아인들과 함께 싸우는 것을 거부한 병사들 때문에 좌절되었다. 결과적으로 빈덱스는 그를 네로에게 고발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인 갈바에게 눈을 돌렸다.[5]
68년 4월 초, 갈바는 빈덱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카르타고 노바(현재 카르타헤나)에서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는 빠르게 히스파니아 바에티카(Hispania Baetica)와 루시타니아(Lusitania)의 관리들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이들은 그에게 갈바의 속주에 주둔한 제6군단(Legio VI Victrix)에 더해 제7군단(Legio VII Gemina) 곧 제7갈바군단(VII Galbiana)을 모집할 자금을 제공했다.[6]
한편, 빈덱스는 도시 시민들이 네로에게 특히 충성했던 자신의 수도 루그두눔(Lugdunum)을 포위해야 했다. 이로 인해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Germania Superior)의 총독 루푸스가 빈덱스를 향해 진군했다. 그는 빈덱스를 지지하는 세쿠아니(Sequani) 부족의 수도 베송티오(Vesontio, 베장송)를 포위했고, 빈덱스는 루그두눔 포위 공격을 중단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출발해야 했다. 베송티오 앞에서 베르기니우스와 빈덱스는 회담을 가졌고, 그들은 네로에 대항하여 세력을 합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베르기니우스의 군단은 그 합의를 무시하고 준비되지 않은 빈덱스의 군대를 공격했고, 2만 명에 달하는 빈덱스의 병사들이 사망했으며, 빈덱스는 자살했다. 곧 라인강 군단은 베르기니우스를 황제로 선포했지만, 그는 거절했다.[7] 병사들은 39년에서 41년까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의 총독으로 재직했을 당시 39년 렌툴루스 가에툴리쿠스의 반란을 지지했던 군단들을 가혹하게 진압했던 갈바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동기를 부여받았다.[8]
로마에서 네로는 갈바의 주장에 저항할 조직을 갖추지 못했고, 심지어 이집트로 도피하는 것을 고려하기까지 했다. 결정적인 행동은 근위대(Praetorian Guard) 부대장인 님피디우스 사비누스가 자신의 부하들을 설득하여 네로를 버리게 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그는 갈바가 각자에게 30000sestertii(10년치 봉급에 해당)를 줄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새 황제에게 보상받을 것을 기대했다.[9] 68년 6월 9일, 상원은 네로를 국가의 적이라고 선포하고 갈바를 황제로 선포했고, 이는 네로의 자살로 이어졌다.[10]
68년의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월 | 사건 |
---|---|
4월 |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총독 갈바와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총독 빈덱스가 네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킴 |
5월 | 라인 군단이 갈리아에서 빈덱스를 패배시키고 사살함 |
6월 | 네로가 상원에 의해 공적(hostis)으로 선포됨(6월 8일) 그리고 자살함(6월 9일); 갈바가 황제로 인정받음 |
11월 | 비텔리우스가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총독으로 임명됨 |
5. 2. 69년
날짜 | 사건 |
---|---|
1월 1일 | 라인 군단이 갈바에게 충성 맹세를 거부하다. |
1월 2일 | 라인 군단이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다. |
1월 15일 | 갈바가 근위대에 의해 살해되다; 같은 날, 원로원이 오토를 황제로 인정하다. |
4월 14일 | 비텔리우스가 오토를 패배시키다. |
4월 16일 | 오토가 자살하다; 비텔리우스가 황제로 인정받다. |
7월 1일 | 유대에서 로마 군대 사령관인 베스파시아누스가 아이깁투스의 군단들에 의해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데르 지휘하에 황제로 선포되다. |
8월 | 다뉴브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다 (시리아에서) 그리고 9월에 그의 편에 서서 이탈리아를 침략하다. |
10월 | 다뉴브 군대가 비텔리우스를 패배시키고 베스파시아누스가 이집트를 점령하다. |
12월 20일 | 비텔리우스가 황궁에서 병사들에게 살해되다. |
12월 21일 |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인정받다. |
5. 3. 70년
69년에 일어난 내전 이후, 70년에는 여러 사건이 발생했다. 갈리아에서는 바타비족의 가이우스 유리우스 키윌리스(Gaius Iulius Civilis)가 반란을 일으켜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 독립 국가는 '갈리아 제국'이라고 불리기도 한다.[23] 그러나 이 반란은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진압되었다.같은 해 6월에는 유대 전쟁에서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참조
[1]
서적
Tacitu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
논문
[3]
논문
[4]
서적
Life of Galba
[5]
논문
[6]
논문
[7]
논문
[8]
논문
[9]
논문
[10]
논문
[11]
논문
[12]
논문
[13]
논문
[14]
논문
[15]
논문
[16]
논문
[17]
논문
[18]
논문
[19]
논문
[20]
논문
[21]
서적
The Histories
Penguin Books
2009
[22]
서적
Life of Otho
https://penelope.uch[...]
[23]
문서
260년부터 274년까지 존재했던 "갈리아 제국"과는 별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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